[연대와 인권] 들리지 않는 소리들의 아우성

2012-11-30     정정훈 (수유너머N 연구원)

1987년과 2012년의 목소리들

2012년이 정치의 해라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현재 한국 사회는 곧 다가올 12월 대선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다. 연일 언론매체는 안철수, 문재인, 박근혜 후보의 언행으로 컨텐츠를 채우고 있으며 국민들은 이들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소위 진보개혁진영은 야권뿐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진영이 모두 이번 대선에서 반드시 정권교체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데에 뜻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MB정권의 반민주적이고 반서민적인 국정운영과 소수 기득권층을 위해 다수 민중들의 삶을 급속하게 불안정하게 만든 통치방식에 분노하는 국민들 역시 정권교체를 열망하고 있다. 또한 야권, 시민사회단체와 사회운동진영, MB와 새누리당 정권에 염증을 느끼는 국민들은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반드시 야권후보단일화가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하고 있다.
여러 면에서 2012년 대선정국은 87년의 대선정국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 우선 민주주의와 서민의 삶을 외면하고 이에 대한 저항을 국가폭력으로 억압하는 정부의 통치, 이러한 정권의 통치를 끝내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실현해야한다는 국민적 기대라는 점에서 2012년은 87년을 닮았다. 또한 전임자와 일정한 차별성을 내세우면서 정권재창출을 시도하는 여당의 후보가 존재하고 이에 대한 대항마로 야권에서 유력한 두 명의 대선 후보가 출마를 선언했다는 것,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야권후보단일화에 대한 요구가 드높다는 점에서도 2012년의 대선정국은 87년의 대선정국의 대선정국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87년이 그랬듯이 2012년도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결국 새로운 정권의 출현, 다른 대통령의 탄생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에서 두 대통령선거의 해는 닮아 있다. 그래서 이번 대선에 대한 무수한 말들이, 정권교체를 역설하는 높은 목소리들이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다.

목소리 마저 빼앗긴 사람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지난 5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내쫓기고, 빼앗기고, 얻어맞고 죽어갔다. 2009년 용산 남일당에서 다섯 명의 철거민들이 경찰특공대의 무리한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화재참사로 세상을 등져야 했으며, 같은 해 평택 쌍용자동차에서 살기 위해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벌였던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경찰특공대에 의해 가혹하게 폭행을 당하고 공장에서 쫓겨났다. 그 이후, 스물 세 명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가족들 또한 산 자들의 세계를 떠나갔다. 그리고 천여 년의 세월을 이어온 제주도의 강정마을 공동체는 그곳에 들어서는 해군기지로 인해 파괴되어 가고 있고, 마을공동체와 구럼비 바위를 지키고자 한 마을 주민들과 지킴이들은 매일 같이 경찰과 용역깡패에게 폭행과 모욕을 당하고 있다. 이들은 생활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일하던 공장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마을에서 쫓겨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겪고 있는 참담한 아픔을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쳐도 이들의 참혹한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용산참사의 진상은 아직도 미궁 속에 머물고 있으며,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은 지금도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강정마을의 고통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쫓겨난 자들은 소리 높여 자신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덮쳐온 자본과 국가의 폭력을 고발하며 정의를 호소하고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이 땅의 지배자들에게 가 닿지 않는다. 거리에서 잠을 자고, 곡기를 끊고, 전 국토를 순회하며 자신들도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임을 외치지만 그들의 말은 마치 소리를 잃어버린 듯 들리지 않고 있다.
단지 쌍용과 용산과 강정뿐만이 아니다. 초고압 송전탑에 반대하며 투쟁하는 밀양과 청도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목소리도,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위해 농성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도, 막가파식 골프장 개발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목소리도, 위험하기 그지없는 핵발전을 막아 내려는 이들의 목소리도, 뭇 생명들이 살아가는 터전을 파괴하고 자연의 순리를 억지로 뒤틀어버리는 4대강 개발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다. 일자리를 빼앗기고, 오랜 세월 살아온 삶의 장소를 빼앗기고, 당연한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기고, 생계의 수단을 빼앗긴 이들이 이제 자신들의 목소리마저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다시, 연대와 행동의 목소리로

지난 10월 5일부터 11월 3일까지, 전국 방방곡곡의 내몰리며 쫓겨난 이들이 싸우고 있는 현장을 순회하였던 2012생명평화대행진은 어쩌면 목소리를 빼앗긴 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위한 행진이었는지도 모fms다. 그리고 대행진 기간 중 개최된 민회에서 결정된 공동행동인 거점투쟁, 즉 대한문 앞의 “함께 살자 농성촌”은 들리지 않는 자신들의 소리를 들리게 하기 위한 절규의 점거인지도 모르겠다. 가진 자들의 더 많은 돈벌이로 인해 쫓겨나는 가난한 철거민들, 핵발전소와 송전탑으로 인해 자신과 마을 공동체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당하는 지역민들, 자본의 이윤을 위해 일하고 살아갈 권리를 무참히 박탈당한 곳곳의 노동자들이 함께 “함께 살자 농성촌”에 참여하고 있다.
2012생명평화대행진의 첫 걸음은 용산이, 쌍용이, 강정이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SKY act'(S:쌍용, K:구럼비, Y:용산)는 목소리마저 빼앗긴 또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그들과 함께 2012생명평화대행진에 참여했다. 단지 쌍용과 강정과 용산만이 아니라 쫓겨나고 빼앗긴 이들 모두의 목소리가 하늘의 목소리가 되는 그런 세상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이 2012생명평화대행진이 끝난 이후에도 대한문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집권하면 모두가 하늘이 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안철수와 문재인의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지면 정권교체를 해내고 그러한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목소리 높여 말하고 있으며, 많은 국민들이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말들에 구체적인 현장의 이야기들은 들어있지 않다. 쌍용, 강정, 용산, 탈핵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았고, 강원도 골프장 난개발과 밀양과 청도의 송전탑 건설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은 제출되지 않고 있으며,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책은 제안되지 못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막연한 구호와 모호한 공약이 아니라 빼앗기고 쫓겨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이다.
‘자크 랑시에르’라는 프랑스의 철학자는 “정치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던 소리를 듣게 하는 행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말할 자격이 없는 이들, 보일 자격이 없는 이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듣게 만들고 자신들의 모습을 보도록 만드는 활동. 그것이 바로 정치이다.
그것은 더 이상 빼앗기고 쫓겨나길 거부하는 이들이, 이러한 폭력과 배제의 시대가 종결되어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 직접 행동해야만 가능하다. 정권교체를 통해 등장할 좋은 대통령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정권교체를 통해 좋은 대통령이 되도록 강제하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선국면에서 쏟아지는 큰 목소리에 묻혀버린 작은 목소리들, 들리지 않게 된 목소리들이 더더욱 커져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란 바로 들리지 않게 된 빼앗긴 자들과 쫓겨난 자들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에 들리게 만드는 정치이다. 이 정치는 결국 빼앗긴 자들의 연대, 쫓겨난 자들의 공동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여기 사람이 있다, 함께 살자!

2009년 용산 남일당 망루 위에서 경찰특공대의 폭력적 진압으로 불길이 치솟아 올랐을때, 철거민들은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외쳤다. 개발이윤과 더 많은 돈벌이 때문에 평생을 일궈온 생계터전에서 사람들을 몰아내던 잔혹한 폭력 앞에서 외쳐진 말이다. 목숨을 버려 외쳤던 이 절규도 저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2009년 평택 쌍용차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경찰특공대의 폭력에 의해 내몰려 공장에서 쫓겨나고 하나 둘씩 그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목숨을 잃어갈 때 노동자들은 “함께 살자!”고 외쳤다. 그러나 그 역시 저들의 귓가에 가 닿지 않았다.
하지만, “함께 살자 농성촌”은 이 두 마디 외침을 끝까지 기억하고 붙들고 있는 이들의 현장이다. 그리고 더 이상 철거민과 노동자들의 주검 위에 탐욕의 부를 쌓아 올리는 세상을 지속하지 않기 위하여, 사람이 아니라 돈이 주인되는 그런 세상을 끝내기 위하여 여전히 “여기 사람이 있다, 함께 살자!”는 외침을 반복하는 이들의 공동 행동이 “함께 살자 농성촌”이다. “함께 살자 농성촌”으로부터 시작되는 정치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제 우리 시대의 정신이 “여기 사람이 있다, 함께 살자!”가 되도록 만들기 위한 그런 아래로부터의 정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