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포차를 시작하며.

2013-02-28     오영애 (힐링포차 운영)

 강정마을 지킴이들의 벌금 마련을 위한 힐링포차를 운영하고 있는
오영애 님(가미 어머니)의 글 입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찬성․반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2002년 길바닥 인생이 시작되고 10년간을 아스팔트 가 내집인 양 초 한자루 들고 때론 천막에서 야영을, 때론 비박을 일삼았다. 2002년 경선까지만, 그리고는 그해 1219 대선 끝날 때까지만... 노무현 승리와 참여정부 탄생. 거기까지가 끝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2003년 취임에 이어 재신임 재검표 탄핵 파병반대 국가보안법 포함 4대 개혁법 등등...

그리고 2007년 이명박 당선.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 마자 광우병, 방송법 KBS, MBC 앞, 시청에서 여의도로...
생활이 뒷전이 되고 가세랄 것까진 없지만 기울대로 기울었고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그만", 을 선언하고 아스팔트와 이별을 결심했다. 들리는 것들엔 애써 귀막았고 보이는 것들엔 애써 눈감았다.
나름 안정된 일상으로 돌아갈 즈음...
그런데 둘째 가미가 눈을 떠버렸다.
처음 가미가 제주 강정마을을 찾게 된건 분명 일 때문이었다. 곧바로 가미의 일이라는 건 끝났지만 가미는 서울에 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가미는 해군기지를 보았던 것이다.

"엄마, 조금만 더 있다 갈게."
그게 시작이었다.
중간 중간 서울엘 오면 열심히 알바를 했고 경비가 충당이 되면 다시 강정마을로 향했다. 처음엔 저러다 말겠지, 저러다 말겠지 그렇게 6개월.
얼마전 놓치기 아까운 일자리가 생겼고 겨우 겨우 설득을 해서 지난 12월 말 제주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엘 왔고 취직도 했다. 미뤄놓은 학업도 시작해야 하기에 대학에 대한 논의도 하고. 그러면 될 줄 알았다.
가끔 가미의 페북을 들여다 보면 여전히 강정을 바라보며 힘들어 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모른 척 했다. 말수도 적어졌고 퇴근 후 자기방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 ‘저러다 말겠지’ 하며 모른 척 했다.
그러던 엊그제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던 가미가 너무 힘들다며 참고 있었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당황도 되고 화도 났지만 겨우 억누르며 타일렀다.
자신이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단다. 겨우 겨우 대화를 시도한 끝에 맘을 열기 시작했다.
역시 강정이었다.
강정에서 함께 했던 언니들 12명 에게 공사저지를 했다는 이유로 1인당 400만원씩 벌금형이 선고 되었고, 400만원이란 거금을 낼 형편이 안되는 언니들이 노역을 결심하고 있다고... 그런데 본인은 아무런 도움을 줄 수도 없고, 함께 있을 수도, 가볼 수도 없다는 상황이 감당하기 힘들다는 게 이유였다.

지난 10년 간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나도 저랬으리라. 남편도 아이들도 나를 어쩌지 못했을 그때가 떠올랐다. 그때 다니던 직장을 접고 아파트를 팔고 여기까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고 누구도 나를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그리고 그날 밤 모녀는 마주 앉아 적절한 합의점(?)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가미 대신 엄마가 나서마, 라고. 그 언니들을 위해서 엄마가 지금부터 어떤 일이라도 하겠노라고. 당장은 벌금을 만드는 게 우선이니 엄마가 그 일에 앞장 서겠노라고.

그 일이란 게... 10년 전 희망포장마차를 다시 가동하는 일이다.
일단은 해군기지반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강정마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딸 같은 열두 명의 20대 꽃다운 처녀들을 이 추운 겨울에 감방노역을 시킬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전국투어 힐링포차를 가동하기로 했다.

어제 하루 트럭과 집기와 천막 구하기 작업을 했다. 다행히 해결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장소 섭외와 홍보를 해야한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까마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막막할 때 가만히 생각해본다. 분명 예전엔 제주해군기지 문제에 아무 관심 없었던 내가 지금은 전국투어 포차를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 힐링포차의 이후 일정은 트위터 ‘강정 힐링포차’ (@healing4cha) 또는 다음 까페 ‘구럼비야 사랑해’ (http://cafe.daum.net/peacekj)를 참고하시면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