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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고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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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02-05-10 11:53:12  |   icon 조회: 4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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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역사


1.머리글

2.빼앗긴 꿈

3.동티모르 침략이유

4.국제사회의 공모

5.세계의 양심

6.동티모르의 소망

1. 머리글
전세계 민간단체들의 시선이 다시 동티모르(East Timor)에 모아지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 갈리의 [동티모르 교전당사자들을 모아 협상케 하기 위한 최종보고서]의 유엔총회 상정을 앞두고 올 5월 말에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동티모르 문제에 관한 세 개의 대규모 국제회의가 연달아 열린다. 1991 년 4월 세계 1l개국의 동티모르 관련단체들이 결성한 International Federation for East Timor(국제동티모르연맹)의 세계회의, 전세계 SOO여명의 변호사들이 가입해 있는 International Platform of Jurists for East Timor(IPJET;동티모르를 위한 국제법률가 회의)의 세계대회, 그리고 이 법률가들도 포함한 전세계 동 티모르 지원단체 들과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Intenational Conference for Independence of East Timor and Indonesian Democratization(동티모르 독립과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를 위한 국제회의)가 그것이다. l9년동안 동티모르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FRETILIN(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은 이제 다시 유엔에서 가능한한 많은 표를 획득하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동티모르는 l975년 이래 인도네시아의 군사 점령하에 있는 지역이다. 제주도의 약 3배 정도 되는 면적과 현재 55만명 정도의 인구를 갖는 이 지역은,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과정에서 인도네시아 군사정권의 침략을 받아 독립의 꿈을 빼앗긴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쟁과 굶주림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20만 명이나 되는 주민이 죽었으며, 점령하인도네시아군의 처참한 인권침해는 국제적인인권 단체 들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작년 11월 27일부터 12월1일까지 민주주의 민족통일전국연합 인권위원회의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FRETILIN 외교부장 마리 알카티리(MariBin Amude Alkatiri, 1949년생)는 지친 표정으로 'l9살 어린 나이로 조국 동티모르의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을 때,나는 이 투쟁이 이렇게 오래 끌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l만 5천 명의 동티모르 주류 인도네시아군 대 2백여 명의 동티모르인 게릴라, 약 2OO명의 인도네시아 외교관 대 4명의 FRETILIN 외교관, 독립을 위한 이 힘겨운 싸움은 l975년 12월 7일 당시 26세였던 마리 알카티리가 다른 두 명의 동지와 함께, 동티모르 독립을 위한 외교전선 구축이라는 사명을 띠고 극적으로 티모르 섬에서 탈출한 후 벌써 l9년째 계속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략 점령 은 이제 원상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는 것일까? 많은 국제정치학자, 인도네시아 연구자, 저널리스트들이 동티모르인들의 싸움은 헛수고라고, 인도네시아는 강대한 나라이며 국제사회도 사실상 인도네시아에 의한 점령을 묵인하고 있다고, 세상은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동티모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대국의 편의주의를 배제하여 국제사회는 다시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민간단체들이 5월 말부터 6월 초에 걸쳐 있을 세 개의 중요한 국제회의로 집결하고있다. 참으로 동티모르 문제는 강대국들의 억지와 공모가 '정의'로 둔갑해 있는 지금의 국제사회가 원칙이 지배하는공정한 국제사회로 나아갈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해 야 할 것이다. 극성스럽게 '국제화'를외쳐대는 이 정부의 외무부 담당자는 작년 마리 알카티리의 면담요청을 '민원'으로 처리하고, "면담은 적절치 않다'는한마디로써 거절했다. 한국의 민중들은 과거 일제통치에 저항해서 훌륭하게 싸웠기 때문에 현재 동티모르인들이민족해방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잘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강점되어버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메아리 없는 외교활동 끝에 이국에서 외롭게 죽은 이준열사의 이미지를 간직한 6척 단구의 FRETILIN 외교부장이 떠나면서 남기고 간 이 말은, 진정 국제사회의 미래에기여하는 우리의 국제화 노력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를 시사하고 있다.

2. 빼앗긴 꿈
> 동티모르 민족주의
면적 l만 5천 평방킬로미터. 섬 중앙에는 험한 산맥, 해안지대에는 얼마간의평야. 커피와 백단)과 대리석이 나는 이 열대사바나 기후 속에서 메라네시 아계, 파프아계, 말레이계가 어우러진 동티모르인들은 전통적으로 화전을 중심으로 한 자급농업으로써 살았다. 생활수준은 낮았으나 기아는 없었다. 동티모르인은 인도네시아 민족과는 다른 하나의 민족이다. 무엇보다도 인구 의 3분의 1이 학살당한 l9년에 이르는 전쟁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포르투갈인이 오기 전부터 싹이 텄던 민족의식은 인도네시아식 침략과 뒤이은 강제적 동화정책과의 투쟁 속에서 타올랐다. 민족은 역사에 의하여 만들어 지는것이다. 포르투갈인이 도래했던 16세기 이전 티모르 섬에는 대체로 두 개의 큰 세력 이 있었다. 서쪽 아토니인 왕국과 동쪽 벨인의 왕국이다. 티모르 말을 쓰는 아토니인은 산악지대에 사는 토착적 민족집단이었고 테퉁 말을 쓰는 벨인은 아토니인보다 뒤에 티모르섬에 와 해안지대에 정착했다. 이 세력 구분은 나중에 그대로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영토분할에 이용되었다. 네덜란드령이 된 서티모르 젊은이들은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바타비아나 암스텔담으로 진학하여 그곳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모여든 젊은이들과 사귀면서 그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의 선도자가 되어갔다. 그러나 당연한 일로서 카톨릭교회에 다니고 포르투갈어를 배운 동티모르인들은 이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운동과는 무관했다. 동티모르인들에게 인도네시아는 이웃일망정, 동포는 아니었던 것이다.

동티모르 민족주의의 계보는 l9 ~20세기에 일어난 포르투갈에 대한 동티모르인들의 몇 개의 대반란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나 포르투갈 식민주의에 저항하고 포르투갈의 민주화운동이나 아프리카의 삭민지해방운동으로부터 자극을 받은 동티모르 젊은이들이 민족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는 것은1970년부터였다. l970년 1월에 수도 딜리의 화이트 칼라나 고등학생들로 구성되는 지하그룹이 탄생했으며, 한국에 온 마리 알카티리는 이 지하그룹 초기 멤버였다. 이 그룹은 1974년에 일어난 포르투갈 본국의 정변 이후 급속히 성장한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 포르투갈 정변과 동티모르 독립운동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야망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 청년 장교들은 무혈쿠데타로 파시스트정권을 타도했고, 새 정권은 자국의 민주화와 식민지의 해방을 약속했다. 동티모르에서는 잠자기 정치운동이 표면화되었다. 즉각 전문직 종사자나 공무원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옹호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것은 곧바로(5월) 티모르사회민주협회(ASDT)로 발전하고, 다시 9월에는 FRETILIN(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ASDT로부터 FRETILIN으로의 발전은 그 정책변화에서 읽을 수 있다. 즉 ASDT가 3~8년의 준비기간을 소요하는 점차적 독립, 식자 프로그램의 진전, 농업 우선의 경제정책, 보건 의료프로그램의 전개 등을 그 정책으로 한 데 대하여, FRETILIN은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독립, 생산,유통,소비분야의 협동조합, 농지개혁, 모노컬처로부터의 탈피, 의식개혁운동, 식자프로그램, 여성운동) 등을 정 책으로 삼았다. 청년들이 이끄는 정당인 FRETILIN의 집회에는 언제나 대부분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수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분명 그 정책은 동티모르 민중의 꿈과 희망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르투갈 정변 직후의 동티모르에는 FRETILIN 외에도 UDT와 APODITI라는 정파가 있었다.

ASDT와 비슷한 시기에 창립된 UDT(티모르민주동맹)는 외국자본에 기대하면서 포르투갈과의 연합을 목표로 주민의 자결권 행사를 주장했다(현재의 UDT는 완전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이 정파를 지지한 층은 딜리의 식민지 관료, 플랜테이션 경영자, 전통적인 봉건 토호들이었다. UDT는 이내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을 주장하는 파와 계속 독립을 주장하는 파로 분열되는데, 전자를 대표하는 것은 초대 당수가 된 동티모르 최대의 커피 플랜테이션 소유자 마리오 카라스 칼라온이었다, 그는 포르투갈시대에 유일하게 허용되었던 어용 정당의 멤버였으며. 인도네시아에 합병된 후에는 제3대 동티모르주 지사를 지냈다. 후자 즉 UDT독립파를 대표하는 것은, 그의 동생 죠아온카라스칼라온이다.그는 지금도 호주에서 조국독립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UDT는 국내기반을 전혀 갖지 못하고 있으며 해외에서의 외교활동만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역시 비슷한 시기에 창럽된 제S의 정당 APODITI(동티모르인민민주협회)는 티모르 , 인도네시아합병협회라는 이름의 정당의 후신이며, 동티모르는 자립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자치를 유지하면서 인도네시아에 합병될 것을 주장했다. 세력은 보잘것 없었으나 인도네시아는 합병을 위하여 이를 크게 이용했으며 합 병의 결과 1976년에 소멸되었다. 그 당수는 합병 후 초대 동티모르주 지사가 되었다. l949년 독립 이후 동티모르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음을 분명히 해온 인도네시아가 본격적으로 동티모르 합병을 생각하는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였으며, 당시 수하르토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정보 치안부서 국군엘리트들은 포르 투갈 정변 이전부터 이미 동티모르의 독립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는 그 외교력으로 1974년 부터 호주를 비롯한 몇 나라의 지원을 획득해갔으며, 같은 해 10월경부터 대 동티모르방송으로 동티모르의 독립운동을 중상하기 시작했다. FRETILIN 속에 중국인이 있다.APODITI가 주장하는 합병은 70%의 지지를 얻고 있다. UDT는 네오 파시스트이다. 공산주의자인 FRETILIN이 친인도네시아파의 대다수 주민을 박해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그 내용이었다.


3. 인도네시아는 왜 동티모르를 침략했는가
우리는 우리집 뒷뜰에 쿠바가 탄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어느 인도네시아인 고관. “홍콩스탠다드” l976. 7. 3).

> 인도네시아의 통치구조-신질서체제
인도네시아는 구네덜란드의 식민지를 거의 그대로 접수하여 한반도의 8.5배에 달하는 1만 3,677개의 섬에 풍부한 자원과 l억 8,5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강대한 나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독립을 선언한 인도네시아는 그 후 네덜란드에 대한 4년 동안의 독립전쟁을 거쳐 1949년에 주권을 획득했으며 l950년에 수카르노는 대중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으면서 인도네시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59년께 수카르노는 '지도되는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거국일치체제를 구축하고 대외적으로는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의 구호 아래 사회주의국들과의 연계를 심화시켜 서방측과 대립관계에 서게 되는데, 과감한 대외정책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인도네시아 경제는 악화의 일로를 치달았고 극심한 인플레에 국민의 불만을 한계에 달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국군과 이슬람교도 대 공산당의 대립이 격화하여 고도의 정치적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1965년 수카르노의 친위대장이 이끄는 좌익쿠데타가 일어났다. 이것은 당시 전략예비군 사령관이었던 수하르토 소장의 역쿠데타에 의해 곧 실패로 끝났으며, 수하르토는 사건의 모든 책임을 공산당에 뒤집어씌워 공산당원 및 그 동조자와 가족들 1백만{50만이라고도 한다) 명을 학살한 후, 1968년 정식으로 정권을 잡았다.

대통령이 된 수하르토는 신질서라는 슬로건 아래 피폐된 경제재건과 발전을 지상과제로 하여, 서방에 투자와 원조를 요청했고 동시에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국군에 국내 치안을 담당케 하여 강력하고도 교묘한 관리지배를 구축했다. 신질서체제는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관료기구와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는 치안관리집단를 두 개의 기둥으로 삼는다.

신질서체제에 있어서 군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인도네시아군은 독립전쟁의 경험이 있고 지방반란을 진압하여 나라의 통일을 유지해왔다는, 그리고 빈사상태에 있던 나라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켰다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국군은 의회에 1백 명의 임명의원을 내고 중앙과 지방의 많은 요직을 차지한다. 인도네시아의 CIA인 국가정보 조정본부, 군첩보기관인 전략정보본부, 국가안정유지조정청 등이 정보 . 치안 부문을 지배함은 물론, 국군엘리트들은 수하르토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의회, 내각, 관료기구를 초월하는 의사결정 서클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군은 일상적인주민관리도 한다.

군사령부는 도 .군 . 읍 . 면 . 리의 행정구에 거의 대응하여 설치되고 있으며, 각각의 수준에서 문민행정과 함께 (흑은 그것을 주도하여) 나라 정책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반대자에게는 가차없는 탄압을 가한다. 이러한 체제는 군에 의한 극단적인 횡포를 일상적으로 낳게 마련이다. 수하르토 정권이 '군사정권'이라고 불리는 것은 층분한 이유가 있는 일이다. 또한 신질서체제는 1억 8천만 국민이 공통의 이데올로기를 갖도록 철저한사상교화를 하고 있다. 그 이데올로기는 젊은 민족주의자 수카르노가 일본의 점령시대에 독립준비위원회에서 제안했던 것으로서 '판치샬라 (건국의 5원칙)라 불리며 형행헌법 전문에 실려있다.

곧 1)유일신에의 신앙 2)인도주의 리며, 3)인도네시아의 통일 4)협의에 의한 민주주의 5)사회정의를 그 내용으로 하는 이것은 수카르노시대에는 슬로건이었으나, 수하르토시대에는 '국가이데올로기'로서 이로부터의 일탈은 반국가적 행위로 규정되며 '반국가전복법'(최고형 사형)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 동티모르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많은 독립운동가 민주화운동가. 종교인 등이 이 5원칙에 의하여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4. 공모하는 국제사회
인도네시아 한 가운데 공산주의 정부가 생기는 것을 왜 자위행위라고 해석하지 못하는가(키신저 회화 기록, 1975. 12. 18).

서방측은 침략시 인도네시아군의 움직임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태에 대한 '이해'를 나타냈고 군사원조와 무기 매각을 계속했다. 서방제의 대 게릴라 전용 무기의 도입으로 전황은 결정적으로 인도네시아에게 유리하게 전개했다. 또한 유엔에 의한 해결 노력에 대단히 비협조적이었으며, 유엔에서의 토의나 결의에서 인도네시아를 외교적으로 지원했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도 전혀 없었다. 인권존중과 민주주의를 염불처럼 표방하는 나라들이 동티모르 문제에 관하여 취한 태도는 국제정치의 위선을 철저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5. 움직이는 세계의 양심들
> 꺼져가는 동티모르 이슈의 불씨를 살려낸 사람들
많은 나라들이 인도네시아와의 관게를 위하여 동티모르 문제를 국제사회에서 매장하려 해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세게의 인권단체, 교회단체, 저널리스트 연대그룹, 연구자들은 동티모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계속 추적했다.

침공 후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를 봉쇄한 사실은 뜻밖으로 인도네시아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봉쇄로 인한 국제적 비난보다는 취재가 봉쇄됨으로써 보도량이 격감하여 국제사회가 이 이슈를 잊어가는 속도가 훨씬 컸던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공산진영에서 일체의 군사원조를 제공하지 않아 동티모르가 동서 대리전쟁의 초점이 되지 않았던 까닭에 언론기관의 관심은 오히려 떨어졌다. 이 시기의 서방측 미디어는 일반적으로 '공산주의자에 의한 학살 보도' 에는 군침을 흘리면서도 동맹국에 의한 침략이나 인권탄압에 무감각했던 것이다.

신문에서 동티모르 기사가 사라졌다. 그러나 정보는(미미했지만) 꾸준히 있었다. 동티모르로.부터의 무선통신, 카톨릭교회, 난민, 지하 저항조직 그리고 간간이 동티모르를 방문하는 외교사절들.... 민간단체들은 그런 정보들을 수집하여 자기나라의 의회나 언론사나 유엔에 전달했고 정기간행물, 책, 사진, 비디오 등을 만들었다. 1991 년에는 영국의 그린 네트라는 컴퓨터 네트워크에 동티모르 문제에 관한 공개토론실이 개설되어 전세계의 관련단체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근래에는 각국에서 강연회, 심포지엄, 세미나 등이 활발하게 열리게 되었다.

6. 동티모르에 주민투표를!
1992년 10월 미국의 양원협의회는 동티모르에서의 인권탄압에 항의하여 인도네시아에 대한 IMET(국제군사교육훈련 프로그램) 230만 달러의 공여를 끊을것을 결의했다. 침략 이후 인도네시아에 대한 구체적 제재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시민과 의원들의 공동투쟁은 이제 곳곳에서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운동도 어려움을 뚫고 꾸준히 성장해나갈 것이다. '원조'를 '인권'과 연계시키려는 대세는 계속될 것이다. 동티모르 주민들의 국민투표 실현이라는 목표를 향해 어렵지만 확실한 행진은 세계 곳곳에서 오늘도 계속된다. 우리는 한 번도 희망을 포기한 적은 없다. l982년부터 l988년 사이는 아주 암담 한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중국 같은 나라의 지원을 잃었다. 외교전략도 쌍무 관계에서 게릴라식 외교로 전환하여 큰 싸움은 피하고 조금씩 이길 수 있는 작은 싸움을 해왔다.이런 작은 전투에서 우리는 항상 이겨왔다. 이제는 큰 전쟁을 치를 만한 시기이다. 이를 위해 l0년 동안 준비해왔다. 승리에 대한 확신 없이 l0년이라는 세월을 준비하지는 못할 것이다(마리 알카티리).
2002-05-10 11: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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