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의 진실
1차 인혁당과 6.3한일회담 반대투쟁

1차 인혁당사건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야기된 ‘6.3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무마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도예종외에 57명의 혁신계 인사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학생들을 배후 조종하여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일으키고 사회혼란을 틈타 공산혁명으로 현 정부를 타도하려 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담당 공안부 검사들은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를 거부하였으며, 정권의 압력에 사표까지 제출하였다. 결국 숙직담당검사가 엉터리로 기소를 하였으나, 수감자들에게 고문을 가한 사실마저 드러나 기소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말았다.

2차 인혁당과 유신헌법 반대투쟁

74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어 장기집권의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전국적인 유신반대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박정희는 이를 무마시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2차 인혁당사건을 조작하였다.

먼저, 당시 학생운동의 상층부였던 이철·유인태 등을 비롯하여 180여명을 체포 기소하였다. 이것이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사건이다. 그리고는 이들의 배후에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에서 공산혁명을 일으켜 현 정부를 타도하려는 지하조직을 찾아냈다고 발표하였다. 이 지하조직이 2차 인혁당이라고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원회’이었다.

이때 박정희는 1차 때와는 달리 법원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사건 관련자(23명)들은 ‘내란예비 음모 및 내란 선동’이라는 엄청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사형8명·무기징역 7명·15년 이상의 징역형 8명 등 하나같이 중형을 선고 받았다. 대법원은 75년 4월 8일, 이 사건의 주요 관계자 여덟 명에 대해 사형을 확정하였고, 놀랍게도 다음날 새벽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된다. 이날의 비극을 두고 국제법학자협의회에서는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하였던 것이다.

무죄판결, 그리고 남은 이들이 해야 할 일

지난 2007년 1월 23일, 법원이 나서 32년 전 판결이 잘못되었다며 무죄판결을 내렸다. 공판조서는 물론이요 유언까지 조작되었던 그들의 죽음이 이제야 진실이 밝혀진 것이다. 또한 같은 해 8월 21일에는 검찰의 공소시효소멸 주장에 대해 법원은 공소시효가 시작된 시점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은 1월로 판단하여 국가배상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인혁당사건에 대한 명예회복과 재심의 움직임은 열사들이 사형당한지 십여 년이 지난 80년대 말에서야 시작됐다. 대구와 서울에서 인혁당 열사 추모제가 열렸고 열사들이 다녔던 학교와 묘소에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70년대 유족들의 규명운동을 벌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은 침묵하였으며, 국가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진상규명을 외치는 사람들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까지 하였다.

그 후 98년 4월 9일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인혁당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위원장 문정현)가 발족하고 나서야 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2002년 9월)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2005년 12월)가 ‘인혁당·민청학련사건이 고문조작’되었다고 발표하였으며, 70년대 박정희의 지휘를 받아 인혁당 조작에 앞장섰던 국정원(당시 중앙정보부)가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인정하였고(2005년 12월), 법원에서는 재심 개시(2005년 12월)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4·9 통일·평화 재단으로 이어지는 열사 정신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군사정권 18년간의 여러 인권유린 사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고문 조작사건이다. 또 그 과정에서 희생당하신 분들은 격동과 변혁의 시기에 깨어있는 의식으로 선구적인 삶을 살다간 분들이었다. 이제 열사들이 간직하고 떠났던 자주·민주·통일·평화의 비원을 가슴에 두고, 그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이다. 이에 재단법인 4·9 통일·평화 재단이 설립되었고 열사들의 뜻을 계승·실천하며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통일·평화, 인권운동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