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영상 ‘세발 까마귀’
독립영화의 근거지 푸른영상(대표 김동원)의 새 다큐멘터리 〈세 발 까마귀〉에는 ‘박노해 다큐멘터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주인공 시인은 1991년 사회주의 노동자동맹 사건으로 구속돼 현재 경주교도소에 수감중이다. 시인은 자신의 다큐멘터리에 당연히 등장하지 못한다. 〈세 발 까마귀〉는 그 갇혀 있는 주인공을 찾아가는 영화다. 우선, 감독과 제작진이 주인공을 면회하기 위해 이른 새벽 경주를 향해 서울을 떠나는 데서 시작된다. 시인의 부인 김진주씨와 동료 김태종씨들이 동행하는 길이다.
“그동안 사회가 많이 변화했다고들 하잖아요. 어쨌든 개인과 사회, 그 변화라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할 지 시인 박노해씨에게 묻고 싶었어요. 감옥 안에서도 끊임없이 그 문제를 모색하는 모습이 전해져 오기도 했고.” 그러나 면회시간은 짧고, 촬영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감독은 본격적인 박노해 찾기를 교도소 밖에서, 박노해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해나간다.
마치 조각그림 짜맞추기와 같은 작업이다. 낡은 사진첩에서 유난히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환한 웃음을 짓는 고등학생 박기평, 작업성격상 분자화해 결속이 어렵다는 시내버스회사에서조차 조직활동에 성공한 뛰어난 운동가, 〈노동의 새벽〉의 시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친형에게조차 숨기던 철저한 조직활동가 따위의 ‘내가 본 박노해’가 모여들었다.
그러나 완성된 전체그림은 뜻밖에도 단순한 ‘박노해 초상’이 아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생활로 답하는 사람들이 있고, 5년 만에 출소해 변화한 현실을 맑은 시선으로 응시하는 동료가 있다. 영화가 그려낸 것은 ‘감옥에 갇힌 시인’을 둔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매일 약수터에 올라 맞은 편 봉우리를 향해 ‘기평아’하고 외치는 어머니를 둔 사회의 모습이다.
시인의 형 박기호 신부는 말한다. “시인이 석방됨으로써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아름다워짐으로써 시인이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아름다워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시인찾기 처음에 제출한 질문의 목적지를 변경해야 한다. 답을 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닐까, 답은 우리들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라고 감독은 생각한다.
<봉천동 이야기〉 등 푸른영상의 이전 작품에서도 나타난, 감독의 주관적 시점을 도입함으로써 〈세 발 까마귀〉는 질문을 내면화해갈 수 있었다.
교도소 면회 이후 감독이 다시 자신의 소리를 줄이고 객관적 서술에 의존함으로써 앞뒤의 맥락이 끊겼고, 영웅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는 감독의 자의식이 때로 시인 박노해의 포착에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세 발 까마귀〉의 진정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안정숙 기자>
한겨레 199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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