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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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25.01.15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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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연대가 갖는 힘

-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를 읽고 -

배여진(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

책
책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그날은 무언가 매우 비현실적이었다. 그 날따라 일찍 잠이 들어 새벽에 일어나 뉴스와 SNS를 통해 들은 소식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헷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부디 꿈이길 바라며 스마트폰에 열려 있는 창들을 열었다 닫았다 수차례 반복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골목에 사람들이 끼어 움직이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는 영상은 트라우마처럼 남아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재생됐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일어난 일로 159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 때 목격했던 댓글창 뒤에 숨어있는 악마들을 다시 만났고, 고인과 유족들에 대한 모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중이다.

책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는 유족의 목소리를 10·29 이태원 참사 작가기록단이 기록하여 정리한 책으로 이태원 참사 가족들이 길 위에 새겨온 730일의 이야기이다. 유족들의 기록이라고 하여 슬픔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상실과 슬픔의 기록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려는 남겨진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 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책임자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가족들이 슬픔에만 잠기지 않고 거리로 나와 내딛는 발걸음의 기록이다. 같은 상실을 겪은 사람들끼리의 연대의 기록이기도 하며 참사의 맨얼굴을 대면하기 힘든 사람들을 위한 용기의 기록이기도 하다. 슬픔과 슬픔이 만나 더 큰 슬픔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이어진 연대의 고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세월호 참사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다. 슬픔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어느 정도의 심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데, 어쩌면 나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방어기제일 수도 있다. 이태원 참사 또한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을 하루아침에 상실한 사람들의 기록을 본다는 건 크나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책에 펼쳐진 활자들은 글자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들과 나의 슬픔의 무게가 같지는 않겠지만 슬픔의 결이 다르지는 않았을 터. 책의 기록을 담은 활자들을 통해 그들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이어진다. 이렇게 슬픔으로 맺어진 연대는 참사와 재난이 닥쳤을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낸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 김산하씨의 어머니 신지현씨는 영정과 위패 하나하나에 구체적인 사람과 삶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p106)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상상해 볼 수 있다. 영정과 위패에 깃들어 있던 159명의 삶을 말이다.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센터장은 이 책의 2부 해설에서 “피해자 모두가 누군가로 대체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세계를 가진 존엄한 인간임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면서 “사회적 위치와 무관하게 누군가에게는 우주이자 세상의 중심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p297)

지난해 12월 29일, 179명의 우주가 무너진 일이 또 발생했다. 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이런 참사가 왜 반복해서 발생하는지 말이다. 삶과 죽음은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복되는 대형참사는 비단 신의 영역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대형참사 이후 유족들에게 가해지는 상황들과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은 매우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 오래전에는 그런 방법들이 유족들을 고립되게 만들며 외롭게 만들어갔을지 몰라도 지금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슬픔의 연대는 힘이 쎄고, 그 고리가 쉽게 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연대’라고 해서 길 위에서 같이 싸우는 것만이 유일한 연대의 방법이 아니다. 우주의 중심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우리가 일상에서 맞서는 것 또한 연대의 방법 중 하나이며, 누군가에게 유족들의 목소리를 진실되게 듣고 성찰해볼 수 있도록 권해보는 것 또한 연대의 방법일 수도 있다.

이 책이 이태원 참사로 인한 슬픔이 골목에 머물지 않고, 그 슬픔에 힘을 담아 곳곳으로 뻗어 나아가 연대의 힘으로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모두가, 모든 것이 조금은 더 ‘괜찮을’ 2025년을 소망해본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한강의 시, “괜찮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