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은 색깔론과 북풍, 그리고 이를 주도해온 국가안전기획부가 결국 도마위에 올랐다. 물론 안기부가 도마위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79년 10·26사건과 관련해 안기부는 일대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 결과 이름도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어야 했다. 또 김영삼 정권 출범 초기 개혁조치의 일환으로 다시 한번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안기부가 북풍이라는 색깔론 공작을 이유로 사정의 대상이 된 것은 처음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더니, 선거때면 단골메뉴처럼 나타나던 북풍이 이제 본격적인 사법적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이번 조사과정에서 지난 대선 막판에 불거져나온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일련의 색깔론 시비가 안기부의 공작에 의한 것임이 밝혀짐으로써 그동안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었던 북풍공작이 사법적 심판을 받게 된 것은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사실 50년대 진보당의 조봉암 사건을 시발로 해서 색깔론을 이용한 야당 정치인에 대한 탄압은 그동안 독재정권이 사용해온 전가의 보도로서 한국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장애물중의 하나로 작용해 왔다. 이 점에서 이번 사정은 그동안 정권 초기에는 으레 있게 마련인, 부정부패에 대한 사정과는 질적으로 다른 역사적 사건이다.
○안기부 ‘정치공작’ 근절 기회
이번 사건으로 안기부는 소위 문민정부하에서도 국가의 안전을 지키는 국민적 기관이 아니라 단지 정권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공안공작을 서슴지 않는 ‘정권의 하수인’이었다는 오명을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 70년대 이후 가장 색깔론에 시달려온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통령 체제가 출범한 이상 이번 북풍수사는 단순히 지난 대선의 북풍공작 관련자들의 처벌을 넘어서 안기부의 정치공작을 근절시키고 북풍과 색깔론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정치적 음해가 이 땅에 발을 붙일 수 없도록 근본적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이번 사건에서 주목할 것은 수사결과에 따라 밝혀지겠지만 북풍공작에 한나라당이 관련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정치적 뒷거래가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만일 북풍공작에 관련된 사람이 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진상을 밝혀야 하며 법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사법적 처리를 함으로써 이같은 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북풍공작 수사발표의 타이밍이다. 즉, 수사발표가, 한라나당이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의 총리인준에 저항하여 정치권이 경색되고 새 정권이 대응전략으로 내세운 총리서리체제가 위헌이라는 압력이 거세지는 순간에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선거철만 되면 때를 맞추어 터져나오는 공안사건의 절묘한 타이밍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이번 수사가 정략적인 표적수사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다른 하나는 이번 수사와 안기부 개혁을 다분히 언론플레이를 하면서 지나치게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점에서 김대통령이 수사를 조용하게 하라고 지시한 것은 뒤늦지만 적절한 지시였다.
○다른 피해자도 명예회복을
그러나 북풍 수사의 정략성 시비 등을 불식시키는 한편 이번 개혁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 있다. 이는 이번 개혁을 단순히 김대통령에 대한 북풍공작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인권위원회 등 권위있는 인권기관이 인정하고 있는 조작간첩사건들에 대해서도 재검토를 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억울한 피해자의 경우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북풍과 공안조작의 피해자는 김대통령만이 아니다. 적지않은 보통사람들 역시 정보기관 등의 공안조작에 의해 무고한 피해자가 되어 왔던 것이 부끄럽지만 우리의 현실이다. 이처럼 새 정권이 힘 없는 사람들의 ‘저 낮은 곳’을 향할 때 진정한 ‘국민의 정부’가 될수 있으며 북풍공작 수사는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승화될 수 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포럼) <정치외교학>
문화일보 1998-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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