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한테도 인권이 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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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테도 인권이 있데이!”
  • 김준한 (남밀양성당 주임신부)
  • 승인 2013.03.2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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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이돈명인권상 수상소감] - 인권 속에서의 만남

 

   
   
 

2회 이돈명인권상을 수상한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사진_ 이우기 

인권, 그게 뭐꼬? 밀양의 어르신들에게 이 단어처럼 어색하고 낯선 말은 없을 것입니다. 한평생 논밭을 갈아 오던 이들도 고차원적인 개념을 이야기 할 때도 있지만 인권이라는 말은 왠지 몸에 맞지 않은 옷인 양 어색한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밀양의 어르신들도 공무원이나 경찰과의 실랑이 중에 아주 가끔씩은 더는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표현할 다른 말을 알지 못할 때 “내한테도 인권이 있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인권이 무엇인지 잘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언론에서 스쳐 지나듯 들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수세에 몰리는 경우가 아니라면 평생 가더라도 결코 쓸 일이 없는 말이 바로 이 ‘인권’이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그런 어르신들이 붉은 송전탑 반대 조끼 하나 걸쳐 입고 나란히 지팡이를 짚으며 오랜만에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삼성동 한전 앞 농성을 위한 기자회견이나 단식을 위한 자리가 아닌, 명동의 번화가 언저리 웨딩홀로 찾아가는 길은 마치 짙은 유화물감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서양화 속으로 들어가 옅게 흩어져가는 동양화의 담묵 같은 생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들어선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 25주년, 창립 20주년을 기념하는 후원의 밤 행사장은 아주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친근한 만남의 자리였습니다. 얼굴도, 그 하는 일도 알지 못하는 많은 분들이, 밀양에서 올라왔다는 인사말 하나만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하고 축하해주며 자리를 안내해 주는 친절을 베풀어 주신 것은 실로 오래간만이고, 그래서인지 그때까지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했던 긴장감을 풀어준 고마운 환대였습니다.

그렇게 처음엔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으셨던 어르신들이 조금 여유가 생겨 주위를 둘러보니 이돈명 변호사가 누구인지 몰라도, 인권상이라는 게 무슨 뜻으로 주는 것인지 몰라도 이 상을 통해 밀양 송전탑 싸움을 지지하고 격려해주려는 천주교인권위원회와 다른 많은 이들의 눈빛 속에 비치는 연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낯설면서도 호감이 가는 자리에서 때마침 어르신들은 그동안 밀양 송전탑 싸움에 관심을 두고 함께 해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밀양을 방문해주신 많은 수녀님과 신부님들, 멀리서나마 후원을 해주시고 밀양의 소식을 널리 전해주신 많은 단체와 개인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두고두고 고마워하셨습니다.

밀양 어르신들은 이돈명 변호사가 누구인지 몰라도, 인권상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 상을 통해 송전탑 싸움을 지지하고 격려해주려는 연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권상 수상식 참관기를 서두에서 길게 이야기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제2회 이돈명인권상 수상식 날의 풍경 자체가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참된 연대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제 이처럼 노동과 생태, 평화와 정의, 빈곤철폐와 차별에 대한 저항이라는 다양한 주제를 인권이라는 큰 틀 안에서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반도 구석구석에서 신음하는 수많은 이들의 말로 다 하지 못하는 아픔이 홀로 목이 터져라 외치다 지쳐 쓰러지지 않고, 이처럼 가느다랄지언정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인권의 큰 바다에서 함께 만나 서로 다르지 않음을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8년이라는 긴 세월, 이젠 현장의 싸움에서 백전노장이 되어가는 어르신들의 절규가 밀양 송전탑 문제라는 지역적인 문제를 넘어서 처음 탈핵으로 나아갔던 순간, 그리고 탈핵이라는 생태적 가치만으로 축소될 것이 아니라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 싸워가는 노동자들을 만나던 순간, 어쩌면 밀양 송전탑 어르신들은 명시적이지 않았을 뿐 인권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해 오셨던 것입니다. 밀양 송전탑 문제로도 밀양에 있는 아홉 군데 농성장에서 당번을 서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쁘게 지켜가면서도 굳이 ‘희망순례’라고 명명하고서 한진, 대한문, 쌍차, 유성, 현대차 비정규직 고공농성장 등을 방문하던 어르신들의 손에는 당신들이 땀 흘려 논밭에서 키워낸 농산물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자식 같은 노동자들이 죽으면 안 된다고 소리 치고, 그들의 건강을 챙기던 어르신들의 짠한 마음이 1박 2일 일정이 끝나고 밀양에 돌아오고서도 오래오래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이돈명인권상을 밀양 어르신들께 드리기로 한 천주교인권위원회의 결정에 참으로 감사한 마음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인권이라는 것이 여유로운 사람들이 한 번씩 들먹이는 그럴듯한 장식품이 아니라, 흙먼지 날리고 두 눈 충혈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피폐해진 싸움의 현장에서 발견된 오래된 미래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즈음에 지난 밀양 어르신들의 희망순례에 대한 화답으로 밀양을 방문한 대구경북 건설노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매섭던 추운 아침, 부북 평밭마을에 오르는 외길 산허리 모퉁이에 마련된 컨테이너 농성장으로 노조깃발을 들고 올라오던 노동자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전까지 건설 노동자라고 하면 마을 곳곳에 100m 높이의 철탑을 세우는,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애비애미도 몰라보는 놈 쯤으로 알고 있던 어르신들에게 그들 60여 명은 그 추운 산모퉁이 길에서 넙죽 큰절을 하고 추운 바람 맞아가며 손수 준비해 온 떡을 나누어 주던, 마음 따뜻한 보고 싶던 자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나마 같이 찬바람 맞아가며 같이 뜨거운 커피 한 잔에 떡 한 줌 들고 웃으며 먹어대던 그 모습은 서로가 처한 삶의 고단함이 다를지언정 결코 만날 수 없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넓은 삶의 지평을 다름 아닌 인권이라는 고귀한 가치로 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이번 인권상 수상의 가장 큰 소감이라고 하겠습니다.

서로가 처한 삶의 고단함이 다를지언정 결코 만날 수 없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는 것, 그 넓은 삶의 지평을 인권이라는 고귀한 가치로 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이돈명인권상 수상이었습니다.

이제 밀양의 싸움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쉬운 싸움은 없었습니다. 어르신들도 스스로 지금껏 싸워 온 가락이 있으니 좀 더 편하게 싸워낼 수 있으리라고 안심하지 않습니다. 오늘 낮이 지나고 나면 아홉 군데 농성장을 지키는 그 어느 곳에서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나는 바람 소리 한 자락, 이름 모를 발걸음 소리, 난데없는 차의 엔진 소리에 벼락 맞은 듯 깨어 부리나케 수선을 떨게 될 어르신들의 고단함이 이어질 것입니다. 지금은 국회 지식경제위 산하 무역에너지소위원회 위원장인 조경태 의원의 큰 도움으로 한전과의 간담회가 이어지고 있지만, 그 결과를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한전은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뒤로는 몰래 마을을 돌며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이간질하다 들켜 불호령을 듣고 쫓겨나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주민대책위를 통해 주민 간의 분열을 책동하는 일들이 계속 진행 중입니다.

질 수 없는 싸움을 계속 이어가며 주위의 아픔에도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노후 핵발전소를 폐쇄하고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중단하며, 생태적 관점에서 에너지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마련하지 않는 이상 제2, 제3의 밀양 싸움은 이어질 것입니다. 이 싸움이 정의롭고 평화롭게 해결되기 위해서는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눈 맑은 사람의 연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각자가 추구하는 바는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인권이라는 연대의 넓은 지평에서 서로 만나고 다투고 웃을 기회가 마련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격려해주신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감사드리며, 밀양 어르신들도 질 수 없는 싸움을 계속 이어가며 주위의 아픔에도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