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왔던 것들을 찾아가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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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왔던 것들을 찾아가는 여행
  • 남도현 (45기 사법연수생)
  • 승인 2014.12.3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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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연수원생 무료법률상담 봉사를 마치며

 

▲ 천주교인권위원회 위원인 서영섭 신부님, 이호중 교수님, 그리고 사무국 활동가들과 함께 한 45기 사법연수원생들

 

정의, 인권...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초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봤음직한 단어일 것입니다. 정의구현과 인권존중은 법을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관용구이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배웠던’ 개념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 어느 곳보다 격렬한 경쟁의 중심에서 오로지 남을 딛고 이기는 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였고 그 경쟁이 끝나는 순간 더 치열한 경쟁의 소용돌이에서 버티는 것만이 목표였습니다. 그 와중에 저희가 꿈꿔왔던 많은 바람은 철없던 시절의 추억이거나 한낱 사치에 불과하였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했던 정의와 인권도 말입니다.

푸념을 하다 보니 저의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45기 사법연수생 남도현입니다. 사법연수원에서는 1년차 연수생들의 수습기간이 끝나면 법률봉사 프로그램을 이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의 동기인 김명수, 김성미, 나황영, 최정병, 한혜선 연수생들과 저는 천주교인권위원회로 지원하여 법률봉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을 지원하게 된 동기는 다양했지만 그 중 공통된 것은 바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선배 법조인들의 많은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추천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습니다.

 

잊고 있었던, 혹은 무뎌져 있었던 인권

 

사실 천주교인권위의 무료법률상담 프로그램은 연수원 30기부터 시작된 전통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희들을 위한 일정이 매우 체계적이고 알차게 준비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첫째 날에는 천주교인권위원이자 많은 공익소송을 담당하신 강래혁 변호사님께서 방문하셔서 예비 법조인들을 위한 생생한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인권위의 공익소송 중 처음 맡은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던 경험, 인권위와의 인연, 공익소송을 하며 얻는 뿌듯함, 업무에 임하는 자세 등이 그 내용이었는데 아직도 사회 초년생 못지않은 열정과 자신감이 가득찬 눈빛은 많은 말보다 가슴을 강하게 울리는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이자 천주교인권위 운영위원이신 홍성수 교수님께서 ‘법과 사회변동’이라는 주제로 열띤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현재 시민사회에서 전개할 수 있는 사회운동 중 입법활동과 소송활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전략적인 고려 없이 사법부에 의한 해결을 원하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셨고 사법소극주의와 사법부의 한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교수님의 다음 일정 때문에, 명동의 유명 국밥집인 ‘하동관’을 좋아하시는 교수님과 같이 점심을 나누지 못한 점은 옥의 티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마지막 강연은 운영위원장이신 서강대 로스쿨 이호중 교수님이 맡아주셨습니다.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많이 뵈었던 분을 실제로 만나 고견을 듣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큰 선물이었습니다. 이번 강의의 주제는 ‘법치와 국가’였습니다. 지배층의 법치와 준법에 대한 오해, 법치주의의 위기, 국가폭력 등이 심도 있게 다루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종북 이데올로기와 위험관리 권력의 위험성이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보수정당의 집권 이후, 친북이라는 개념보다 더욱 강화된 종북이 등장하였고 현재 그 단어가 만연하게 사용되고 있는 점은 과거 매카시즘의 사례를 볼 때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사안입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는 세력에 대한 법의 심판은 있을 수 있겠지만,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종북’의 굴레를 씌워 배격하려는 태도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의 장애가 될 뿐입니다. 또한 생존과 직결되는 위험은 등한시 한 채 특정범죄자들을 위험요소로 규정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 일반 국민에 대한 과도한 통제를 확장하는 것은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위험일 뿐입니다.

이에 대한 토론은 다음 날 뒤풀이 자리에서도 계속되었는데 대학교 때에도 경험하지 못했던 낭만어린 그림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인권위에서는 문화적 갈증을 겪고 있던 연수생들에게 단비와도 같은 여러 문화체험도 제공해 주셨습니다. 대학로에서 보았던 뮤지컬 ‘빨래’는 웃음, 감동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등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마지막 날 시청한 정윤석 감독의 ‘논픽션 다이어리’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 많았던 1994년을 배경으로 그 중 가장 세간의 논란을 불러일으킨 ‘지존파’ 사건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풀어나갔습니다. 사형제라는 무거운 담론부터 그 당시-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은-사회구조의 모순과 폐해를 담담한 형식으로 이야기하며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 사회를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시청이 끝난 후 연수생들끼리 모처럼 심도 있는 토론이 이루어졌습니다. 시국에 대한 생각과 사형제 폐지에 관하여 격론이 오갔는데 “사형제 폐지는 결국 개인의 가치관 문제나 여론만으로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다.”라는 김정욱 신부님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일반시민들에게는 여전히 접하기 힘든 사법 서비스

 

무엇보다도 저희 법률봉사의 방점은 무료법률상담에 있었습니다만 뒤늦게 찾아온 강추위 탓인지 많은 상담자 분들이 찾아오시진 않았습니다. 저희는 연수원 내에서 실제 사례를 각색한 기록을 보며 법률적 해답을 찾아나갑니다. 정형화된 기록을 몇 번이고 풀다보면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 때문에 사안의 답을 도출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나 법률상담에서는 기록이 아닌 어느 한 곳도 가공되지 않은 사실이 주어집니다. 당혹스럽다는 말이 적확할 것 같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법조항과 판례를 찾기 위한 손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겨우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예전에 배웠던 것들을 끄집어내고 서로 머리를 맞대며 만족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저희가 가진 지식의 한도 내에서 답을 내놓았습니다. 지금도 부족한 점에 대해선 송구스럽습니다만 저희의 의견을 잘 들어주시고 감사의 표시를 해 주시는 의뢰인 분들을 볼 때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더욱 더 공부에 매진해야겠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대부분의 의뢰인 분들은 ‘절박함’을 가지고 오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곳저곳 알아보셨지만 답답함을 해소할 길이 없어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변호사 수가 올해 2만 명을 넘었지만 아직도 일반 국민들에게 사법 서비스는 접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좀 더 명쾌한 답을 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통해 법조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밑거름을 얻어갑니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할 것을 이 자리를 통해 약속하겠습니다.

 

인권구제 최후의 보루는 법제도이지만, 그 이전에 인권이 존중되는 세상을 위한 끊임없는 사회적 노력이 절실합니다

 

내일도 명동으로 출근해야 할 것 같은데 저희의 1주일이 너무나 빨리 지나갔습니다. 우선 위에서 언급한 분들을 비롯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인권만을 생각하며 우직하게 일하시는 활동가 분들, 다양한 현장에서 소외된 분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시는 서영섭, 김정욱 신부님, 선배 법조인으로서 귀감이 되어주신 김현성 변호사님께 진심어린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1주일간의 느낌을 글로 옮기기는 하지만 인권위에서 얻어가는 모든 것들을 글로 형언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연수생들에게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을 하나 둘 챙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오히려 봉사를 받고 갑니다. 이제는 이런 것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인권은 정치성향에 의해 그 무게가 정해지거나 의미가 퇴색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권은 보편타당한 가치이며 성향에 따라 좌우될 만한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인권이 침해될 때 이를 구제할 최후의 보루는 법제도이지만 그 이전에 인권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사회적 노력이 절실합니다. 그 노력에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께서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시기를 기대합니다. 날씨는 추워지지만 언젠가는 훈풍이 불듯이 우리의 권리도 따듯한 봄을 맞이하기를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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