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이 그리는 세상
몽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어느 새 ‘평등’이 우리 앞에 성큼 와 있는 것일까? 지난 6월 29일 정의당 장혜영 의원의 대표발의로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되었다. 바로 그 다음 날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평등법) 제정에 대한 의견표명을 했다. 2011년 차별금지법 제정을 목표로 출범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랫동안 싸워온 활동가들조차 차별금지법안이 발의조차 되지 못했던 지난 20대 국회를 생각하면 어느 때보다 ‘좋은’ 입법 환경이라고 말한다. 코로나19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차별과 연관 지어 생각하도록 했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바라는 목소리도 그 어느 때보다 드높다. 평등하지 않은 세상에서 평등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은 차별금지법이 유예되어온 시간을 뛰어넘는 희망을 준다.
차별금지법이 그리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차별금지법이 존재하는 세상,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래는 상상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 그 싸움의 행로가 어디를 향하는지는 다른 반차별 운동의 역사를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2007년 제정된 ‘개별적 차별금지법’에 해당하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대표적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쟁취의 역사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우리가 복지와 시혜 속에 자리 잡은 ‘배려’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권리’에 포획된 순간, 그 열망이 우리의 삶을 어떠한 고단한 행로로 인도할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의 정의와 현실의 간극 속에서도 사무치게 벅차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건 혜택이 아닌 권리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 이전부터 장애인복지법에서는 이미 ‘누구든지 장애를 이유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차별금지 조항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장애계가 차별금지법을 요구했던 이유는 위 조항이 단지 ‘선언’ 이외에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실효성 차원이 크지만, 법에 새겨진 ‘복지’라는 해결책과 ‘장애’에 대한 문제인식이 당사자들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신체적․정신적 결함 혹은 손상(impairment)을 가진 사람, 그래서 복지서비스를 통해 혜택을 받는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장애인권운동은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비판하고 거부해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휠체어가 탈 수 있는 저상버스가 있다면 신체장애인의 결함은 더 이상 ‘결함’이 될 수 없다.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지원해줄 수 있는 조력자가 있다면 낮은 인지 능력은 더 이상 한계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원활하게 의사소통 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과 관계가 생기기 때문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인이 경험하는 차별은 장애라는 결함, 손상, 한계 때문이 아니라, 장애인이 온전하게 사회구성원으로서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는 사회적 제도와 인식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계기이기도 했다. ‘복지를 넘어서는 인권법’을 제정하려는 당사자들의 투쟁은 혜택으로 포장된 시혜가 아니라, 차별시정을 통해 실현되고 보장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열망을 담은 것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아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해 발의하려고 뛰어다녔다는 이야기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유다. 마음 졸이면서 국회 여기저기 누비지 않은 곳이 없었을 발걸음을 떠올려보게 된다.
장애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제안은 지금 이 순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부재하는 한국사회에 차별의 원인과 배경이 무엇인지를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 한 줄기 역사다. 소수자들이 차별받는 이유는 이기적인 맘충이기 때문에, 동남아 출신이기 때문에, 동성에게 끌리기 때문에, 나이가 적거나 많기 때문에,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여성을 타자화하고 돌봄노동을 폄훼하는 남성중심적 문화, 출신국가에 따라 신분과 자격을 계층화하는 노동정책, 동성애를 병리화 하는 이성애중심주의, 남들과 최대한 비슷하게 살 것을 강요하는 생애주기 과업, 학벌․학력을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자원이라고 여기는 사회가 아니라면 어떨까? 소수자마다 각기 다른 지위는 그저 말 그대로 ‘차이’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사람들에게 차별이 자신의 탓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나 혼자서 경험하는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에서 비롯된 문제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무엇보다 그러한 사회에 맞서서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평등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자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사건을 살펴보면 장애를 사유로 한 진정이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이전인 2001년 11월부터 2008년 4월까지는(6년 6개월) 14.0% 수준이었지만, 시행 이후 1년도 안 되는 2008년 4월부터 2009년 12월까지는 무려 50% 수준으로 크게 증가한다. 장애인 차별이 그 사이에 폭발적으로 증가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보다는 사회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여겨졌던 차별을 부당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법의 존재, 과도한 혜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되찾겠다는 당사자들의 싸움이 가시적으로 등장하고 조직된 결과다.
마찬가지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세상에 ‘차별’이 사라질리 없다. 오히려 더 많은 차별 ‘사건’이 등장할 테다. 어쩌면 코로나19로 드러난 것 이상으로 한국사회의 온갖 불평등과 부정의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 미래를 ‘혼란’이 아니라 평등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읽을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으로 쌓아가야 할 결과다.
정확한 명명은 해방의 시작
차별금지법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종 즐겨 말하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번역’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권을 실현하는 법이라면, 그 사회참여를 가로막고 있는 기존의 조건을 없애거나 완전한 참여를 위해 꼭 필요한 조치(Reasonable Accommodation)들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이 용어를 ‘합리적 배려’가 아니라 ‘정당한 편의’라는 말로 관철시킨 역사는 단순히 표현의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전자는 시설(고용주 혹은 제공자)의 입장에서 사정에 따라 혹은 의지에 따라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조치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장애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당연하게 전제되고 마땅하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장애인을 복지제도에 의존하거나 선의를 가진 타자의 배려에 기대는 존재로 보는가 혹은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서 배제되지 않을 권리를 가진 존재로 보는가의 차이에 가깝다.
페미니스트 레베카 솔닛이 자신의 책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을 바꾸려면 모든 것을 그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확한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가 될 수 있다. 모든 조문 하나하나에 지난한 협상과 물러설 곳이 없는 것처럼 버틴 흔적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법조문에 매달리는 건 모든 차별을 없앨 수 있다는 순진함이나 완벽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로서 법제도라는 공적 영역에 새겨지고자 하는지, 그래서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를 담는 투쟁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떠올릴 때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담겨 있는 ‘차별금지사유’의 의미를 떠올린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 속해 있는 135개의 단체가 망설임 없이 도달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합의는 ‘후퇴 없는 차별금지사유’였다. 우리는 누군가의 권리를 박탈하고 지워버리려고 하는 시도에 맞서지 않으면서 우리 모두의 권리를 지킬 수는 없다는 합의가 차별금지사유를 통해 드러나도록 할 것이다.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지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이분법적인 성별 규범을 드러내고 그로 인해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하는 ‘성별정체성’ 차별금지사유가 차별금지법에 새겨지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차별금지사유를 가리키며 성차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주장하고 싸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함께 싸움의 전망을 계속 그릴 수 있다면
하지만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일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모든 것이 해결되는’ 단선적인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도 한다.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은 2007년 제정과 2008년 시행으로 결실을 맺었다. 법에 새겨진 자신의 권리를 확인하고 되찾고자 하는 사람들도 증가했다. 하지만 2009년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인권위원회의 차별조사 인력은 증원되기는커녕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명목으로 예산이 삭감되었고, 국가인권위 자체 정원이 대폭 축소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맞이했다. 이전의 장애인복지법과 다른 차원의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만들고자 했지만, 장애인의 권리침해가 지속되고 평등이 실현되기 어려운 조건이 오히려 외부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장애차별 진정은 매년 전체 진정 건수의 50%가 넘지만, 2018년까지도 전체 장애차별 진정에 대한 취소 및 각하율은 90%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실질적인 권리 구제가 이루어진다고 보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진정대상이 법무부의 시정권고를 받고도 불이행하는 경우, 구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법무부 장관이 시정명령이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는 ‘시정명령’ 제도도 있다. 하지만 제정된 이후 2018년까지 11년간 국가인권위회가 법무부에 시정권고한 133건 중 시정명령 집행이 결정된 건 단 2건뿐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제정이라는 큰 문턱을 넘어야 하지만, 제정된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결과를 피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과를 그저 언젠가 맞이하기 위해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2003년 장애인권운동 진영이 결집해서 만든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가 2007년 법제정을 빼고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로 전환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장애운동계를 배제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차별을 조사할 국가인권위 인력 예산이 삭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법이 제정된 이후에 수차례 개정 운동을 펼쳐 나가고 시행령을 붙들고 씨름할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일까. 우리는 ‘환상이 깨진 후에도 그 환상을 간직하려는’ 운동의 생명력을 가늠해보려 애를 쓸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은 장애인 당사자 대중의 강력한 필요와 욕구를 조직해내면서도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에 함께 하는 수많은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장애인이 경험하는 일생의 차별을 ‘장애인의 문제’가 아니라 장애와 비장애라는 관계, 장애를 한계로 고정하는 차별 구조의 문제로 설득해 낸 힘이기도 했을 것이다. 차별적인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은 결국 싸우는 사람이 연대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떤 싸움의 전망을 만들어갈 것인지에 달려있을 뿐, 법 제정은 권리의 미지막 보루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모두의 권리를 근간으로
‘우리가 가는 길이 역사다.’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 축하연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투쟁 숭리 문화제, 운동의 역사를 정리한 장애인차별금지법 백서의 제목은 모두 같다. 장애인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길은 장애인 인권의 새로운 역사이기도 했고, 또 다른 반차별과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참조점이기도 했다. 그 연속선 위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는 과정도 새로운 역사가 될 수 있을까?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후 10년이 흐른 2017년,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한 활동가는 제정의 필요성 주장을 넘어서 법 제정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를 질문했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장추련이라는 당사자 조직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연대와 전방위적이고 헌신적인 운동의 역사를 꼽았다. 이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단위들이 장애인권운동처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필사적인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게 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국회에 달려 있을 수 있지만, 차별을 없애나가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입법 운동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은 결국 모두의 권리를 근간으로 자신의 권리를 말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성소소자의 권리를 부정하려는 보수개신교 세력으로부터, ‘가짜난민’은 안 되고 ‘국민먼저’ 챙겨야 한다고 말하는 극우 흐름으로부터,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를 강화하는 집단으로부터, 코로나19 상황에서 반복되는 소수자 차별과 감염인 혐오로부터, 내가 다른 사람의 존재와 관계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고 느끼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만날 것이고, 또 만나게 되길 기대한다.
*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몽님이 직접 쓰신 글로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글입니다.